자살은 끔찍하다. 하지만, 중고등학교때 공부밖에 하지 않았을 새파랗게 젊은 카이스트 대학생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 황량한 사회가 더 쓸쓸해 보인다. 나도 역시 그들처럼 학창시절에 공부밖에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대학교에 가서 각자 지역 혹은 학교에서 1,2등을 다퉈했던 애들과 경쟁을야 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자살할때의 마음을 100%로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어느정도 이해한다.
대학교 일학년이 시작하면, 말 그대로 싱그러운 인생의 '청춘'이 시작하는 줄 알았다. 자기가 관심있는 수업을 챙겨듣고, 다른 분야에 지적인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을 만나고, 여유럽게 학교를 거닐면서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치열한 경쟁으로 추억이라곤 책과 연필 뿐이던 고등학교 시절을 다시 반복하리라곤 상상 못했으리라. 꿈에도.
사람마다 그들의 삶을 선택하는 방식이 다르다. 하지만, 상당수의 공부잘하는 학생들에게 하느님은 공부하는 재능과 더불어 불행한 재능을 주셨다. 그것은 삶의 많은 활동에 제한을 주는 거대한 '자의식'이다. 각자의 내면의 커다란 자의식은 그들에게 속삭인다.
'공부 잘하는 것은 너가 널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것이야, 그것을 다른 녀석에게 빼앗기면 안돼.'
살아오면서 나의 이름 석자를 누군가 부를 때, 다른 친구들은 공부잘하는 아이라고 먼저 떠올리고, 그것이 나를 특별하게 하였다. 모범생들이 거만하다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보다 다른 능력(사회적, 육체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공부만이 마지막 삶의 끈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들의 땅을 디디고 있는 유일한 영역이 흔들리는 순간,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만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남에게 손을 먼저 내밀줄 모른다. 자존심이 강한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게 익숙해져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망상적일 만큼 싫어하기 때문이다.공부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자살한 학생들은 낮이든 밤이든 수많은 상상을 꿈꾼다. 중고등학교때 더욱더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면, 아니면 다른 사회적인 분야에 좀더 신경을 썼었다면, 지금의 나는 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꿈꿀수록 자신이 비참해지고 누차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겨울치 만큼 상상하고 상상했다. 대체 누가 청춘은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했느냐고 분노도 했다. 청춘은 싱그러운 봄이 아니라 인생의 처절하고 잿빛의 암흑이라고, 이조차 누가 들을까봐 속으로 작은 소리로 외쳤다.
한때, 카이스트라는 정문에서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만족해하는 아이의 순수한 웃음이 찍힌 사진만이 살아 남아있는 부모님들을 가슴아프게하는 흉물로 남아있다.
누가 그들을 자살로 내몰았는가? 현재 서남표총장이 만든 장학금제도가 표적이 되고 있다. 분명, 3.0미만인 학생이 성적에 따라 600만원에 달하는 수업료를 내는 것은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문제는 중고등학교의 치열한 입시과정을 그대로 답습해 취업을 위한, 학교실적을 위한 대학교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가 가장 크다. 그리고 뛰어난 어린 학생들을 다른 학교보다 먼저 데려와서 그들이 소질있는 과학분야를 뛰어난 교수들에게 집중적으로 배우게 하면 학교를 드높일 엘리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카이스트의 정책자체엔 더욱 가슴아픈 허점이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자유로운 학문적 탐험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교정을 거닐며 여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학생이다.
기성세대는 다 알지 않는가.
그들에게 현실의 가혹함을 느끼게 하기에는 젊음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정신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만든 틀 속에 갇아놓은채
그들에게 더욱더 젊음의 당찬 용기라고 말하기 부끄럽지 않는가.